포항 여행
나의 에너자이저, 웃음버튼, 웃음치료사, 한밤중의 야식같은 존재,, 등등
날 힘나게 하는 그 어떤 수식어를 갖다붙여도 과언이 아닐 민지언니와 함께
언니의 고향인 포항으로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언니는 일 끝나고 오는거라 도착하면 밤 11시.
아무 일정이 없는 나는 그 시간까지 집에 틀어박혀 있기가 아까워
5시반 기차를 타고 8시반쯤 먼저 도착해있기로 했다.
언니의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호텔에서 묵기로 했는데 영일대 해수욕장 바로 앞에 있는 곳이었다.
언니가 오기까지 남은 약 2시간 동안
혼자 음악을 들으며 계속 계속 밤바다를 거닐었다.
사람도 많지 않고
근처 술집들은 적당히 붐비고
밤바람은 다소 쌀쌀했지만
마음은 오랜만에 아주 아주- 편안했다.
가만히 바다를 보는데
코 끝이 살짝 시려올만큼,
그 정도로 나에겐 혼자만의 휴식이 간절했던 시기였고 말이다.
솔직히
여행 동안 네 생각이 그리 많이 나지 않았다.
언니와 함께 있는 게 즐거웠고, 이렇게 웃으며 떠들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소중했다.
그 사실에 슬퍼질 만큼, 나는 한 순간 한 순간이 너무나도 행복했다. 조금만 더, 하루만 더를 속으로 내내 외쳤다.
작업 마감일만 아니면 정말로 하루 더 있다 왔을텐데, 마음이 급해 그냥 다음날 저녁 기차를 타고 돌아왔다.
이 여행을 통해 느낀 건-
너 없이 혼자 떠나보는 게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거.
같이 있으면 마냥 웃긴 사람, 기분을 살피지 않아도 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순간들은 생각보다 너무 소중한 일이라는 거.
여행을 마치고
서울역까지 마중을 나온 너와 함께 집에 오는데-
갑자기 또 가라앉는 기분이 싫었다.
어차피 마감일 하루 미룬 거, 하루 더 있다 내일 아침에라도 올 걸.
그냥 다시 너에게로의 적응이 필요한 거겠지?
끝이 나고 있는 걸까.
몰라. 모르겠다.
신청한 심리상담센터에서 얼른 연락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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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러운 얘긴 여기까지 하고, 기억나는 대로 줄줄 읊어보는 여행 일지 :)
우선 두어시간 동안 밤바다를 거닐며
계속해서 애니메이션 알라딘의 넘버인 'a million miles away' 를 들었다.
나는 노래를 듣는 당시의 상황과 기분을 모두 기억해버리는 이상한 능력(..?) 이 있다.
향수를 뿌리면 그 향수를 뿌렸던 과거의 날들이 떠오르는 것과 비슷한 맥락인데,
어떤 노래를 들으면 그 노래를 들으며 내가 어디에서 뭘 하며 어떤 기분으로 있었는지가 함께 재생되는 거다.
이걸 나쁘다고 느낀 적은 거의 없지만,
단점이 있다면 좋아하는 노래를 힘든 순간에 듣지 못한다는 거다. 좋아하는 노래에 슬픈 기분이 덮히는 게 싫어 나는 아무때나 노래를 편히 듣지 못하곤 한다.
어쨋든 하고싶은 말은-
나는 그날 밤 내가 좋아하지만 아껴들을 수 밖에 없었던 그 노래들을 아주 그냥 마음껏 들었다는 거다!
알라딘 노래는 실사 영화에서 제외된 넘버였어서 모르고 있던 노래였는데,
기차 안에서 처음 듣자마자 너무 좋아서 거의 두세시간 동안 반복재생을 했다.
이제 그 노랠 들으면
포항의 밤바다가 함께 재생되겠지 :) ㅎㅎ 좋다.
그렇게 기분 좋은 순간들을 한참동안 저장하다보니
어느새 언니가 부모님 차를 타고 내 쪽으로 도착했다.
가까운 곳에 위치한 조개구이집에 데려다주셨는데-
이모들이 다 민지언니랑 친한 분들이셔서
무려 광어와 밀치회를 서비스로 받았다.
세상에,, 내 위가 조금만 더 컸어도 마지막 매운탕까지 쓸어올 수 있었을텐데,,
언니의 아버지께서 계산을 해주셔서 너무 감사히도 비싼 해산물들을 배터지게 먹을 수 있었다.
언니랑 나는 최선을 다해 먹부림을 부리다
진짜 배가 터져 죽기 직전에 인사를 드리고 호텔로 들어왔다.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깔끔하고 좋아서 엄청나게 신이 났다!! 나는 시간보단 공간에 많은 영향을 받는 사람인 것 같다. 정돈되구 깔끔하면서 아늑한 공간에 있으면 더불어 맘과 몸이 함께 정돈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커다란 티비를 보면서 시덥잖은 얘기들로 깔깔대며 웃고,
편의점에서 사온 스파클링 와인을 한두잔씩 마시면서 놀다가
일 마치고 와 피곤했던 언니가 먼저 잠들고, 나는 조금 더 놀다가 4시쯤 잠들었다.
웃긴 에피소드 하나.
언니가 끈질기게 보자던..
제목이 '이상한 이야기' 였는지 '놀라운 이야기' 였는지
재연배우들이 사건을 구성해서 보여주는 뭐 그런 프로그램이 있었다.
처음엔 아 이게 뭐야- 하다가
나중엔 점점 흥미진진해서 같이 몰입해서 봤는데
그 상황 자체도 어이없고 웃겼지만
여자재연배우가 대사를 치는데
자막에 '화가 단단히 난 여자 (24)' 라고 써있어서
그거 갖고 한참동안 깍깍대며 웃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다가 아이돌 프로그램 킹덤도 보고, 이것저것 보다가 티비를 켠 채로 잠들었다.
다음날 11시쯤 일어나 빈둥빈둥거리다 씻고 점심 먹으러 갈 준비를 했다.
매뉴를 물회로 정하고 가게에 가는 길에
바닷길을 걸었다.
어제 몇 시간 동안 걸었던 길인데
날씨도 좋고 바람도 좋은 낮에 걸으니 감회가 남달랐다.
너무 예뻤고, 정말 너무 좋았다.
물에 들어가긴 쌀쌀한 날이었는데 어김없이 물 속에 들어가있는 애기들을 보며 웃기도 하고
길가에서 닭꼬치 하나를 사서 나눠먹기도 하면서
햇빛 좋은 길을 기분 좋게 걸었다.
원래 가려던 가게가 웨이팅이 너무 길어서
그 옆 가게에 갔다. 이 가게도 꽤나 유명한 가게랬다.
나는 물회국수, 언니는 육수물회를 먹고 같이 먹을 초밥 하나를 더 시켰다.
찐은 매운탕이었다,, 너무 맛있었움.
물회값은 언니가 계산해줬다.
역시 배터지게 먹고
근처 팬케이크 카페에 갔다. 이번엔 내가 사줘야지! 하면서 :)
바닷가가 보이는 카페여서 너무 예뻤다.
기본 팬케이크에 아이스크림 추가, 레몬에이드, 딸기라떼를 시켰다.
레몬에이드에 작은 벌레가 들어가있어서 언니가 바꿔주러 갔다오기도 했다. ㅎㅎ
언니 사진도 찍어주고, 장난도 치고, 언니 일하는 미용실 얘기도 듣고 하면서 재밌게 있다가
다시 바닷길을 걸으러 나갔다.
애인 문제 때문에 심리상담을 받으려 한다는 이야기도 했고
언니가 내 편을 마구 들어줘서 좋았다.
언니랑 얘기하면
내 상황이 해결되거나 고민이 없어지는 건 아니지만
언니에겐 그 어떤 얘기를 해도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라서 일단 마음이 편해진다.
엄청 심각하게 진지하게 상담해주는 스타일도 아니고
가끔 언니만의 이상한 개그로 자꾸 치고 들어올 때도 많지만
그냥 그게 재밌다. ㅎㅎ
내 고민이 가볍게, 유쾌하게 다뤄지는 게 마냥 싫지만은 않다.
그러다가도 진지하게 들어줄 땐 또 잘 들어주기도 하고 말이다.
바닷길을 또 한참 걷다가
다시 호텔로 돌아와서
유튜브나 티비를 보며 쉬었다.
언니가 아이돌 에이티즈에 빠져서 영상도 같이 봐주고 했다.
너무 짧은 1박이었기에
진지한 고민상담 같은 건 할 시간도 없었지만,
어쨋든 나는 '진짜 휴식'을 취하고 왔다.
아버지께서 많이 계산해주신 덕분에
돈도 별로 안 들었고
날씨도 좋았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웃기만 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다음에 언니가 어디 가자고 하면
군말없이 무조건 따라갈 생각이다ㅎㅎ
행복했던 포항, 안녕-!